5년 전, 부산의 한 쪽방촌 주민이었던 고) 장○○ 씨는 가족 없이 세상을 떠났다. 공영장례를통해 무연고 봉안시설에 안치된 그는 현행 제도에 따라 일정 기간이 지나면 별도의 추모 의식 없이 산골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생전 고인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해왔던 주민들은 그를 그렇게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수년 동안 함께 살아오며 찍은 사진과 기록들을 모아 행정기관에 제출했고, 결국 연고자 지위를 인정받아 직접 추모 의식을 열고 유골을 산골할 수 있었다.
이 사례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보여준다. 죽음을 둘러싼 제도는 점점 정교해지고 있지만, 정작 죽음을 감당하는 관계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틈에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과연 제도만으로 죽음을 책임질 수 있는가.
<죽음은 점점 전문가의 영역이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더 이상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의 병원 임종률은 75.7%에 달한다. 반면 자택 임종률은 8.3%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만큼은 익숙한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제 죽음은 대부분 병원에서 이루어진다. 의료기술의 발전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라기보다 최대한 늦춰야 하는 의료적 사건으로 만들었다. 임종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집보다 병원을 찾고, 죽음은 가족보다 의료진의 관리 아래 놓이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병원을 선택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 죽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경우가 많다. 가장 큰 이유는 돌봄 부담이다. 임종기에 접어든 환자는 식사, 위생, 이동 등 일상 전반에 걸쳐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현재 재택간병서비스는 하루 몇 시간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아 결국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대부분의 돌봄을 감당해야 한다.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죽음』의 저자 우에노 치즈코는 집에서 죽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가족이라고 말한다. 이는 가족이 죽음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병원을 선택한다. 보건복지부의 ‘2020 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좋은 죽음이란 가족이나 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 신체적, 정신적 고통 없이 임종을 맞이하는 것, 임종 전후의 상황을 스스로 정리한 후 임종을 맞는 것, 임종 시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이 함께 하는 것이다.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과 ‘임종시 가까운 사람이 함께하는 것’은 상반된 조건처럼 보이지만, 이는 죽음에 있어 자기결정권 실현이 개인의 독립적인 선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실현된다는 점을 시사한다.관계가 죄책감이나 돌봄의 부담으로남기보다는 감사와 애정의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이다. 재택의료 인프라도 충분하지 않다. 가정형 호스피스는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가 팀을 이루어 환자의 집을 방문하는 제도지만, 전국 기관 수는 40여 곳에 불과하며 상당수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재택의료센터와 가정형 호스피스가 별도로 운영되면서 돌봄 체계 역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만 해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병원 임종이 일반화되면서 장례 또한 병원 장례식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오늘날 장례는 대부분 정해진 절차를 따른다. 빈소를 마련하고조문객을 맞이하며 식사를 제공하고 발인을 진행한다. 여기에 상조회사는 장례식장 예약부터 화장장 접수, 장례용품 준비, 각종 행정절차까지 장례 전반을 대행한다.물론 이러한 시스템은 유족의 부담을 덜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죽음이 점점 개인의 삶과 공동체로부터 분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가족과 이웃이 함께 감당하던 죽음은 의료기관과 장례산업이 처리하는 전문 영역이 되었다.
<<사람들은 다른 죽음을 원한다>>
흥미로운 점은 현실과 사람들이 원하는 죽음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한국 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죽음은 가족이 곁에 있는 가운데 자신의 집에서 평온하게 생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한국죽음학회가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를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죽음 자체는 피할 수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 맞이할 것인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자가 320만 명을 넘어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회복 가능성이 없는 임종기에 접어들었을 때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기록하는 제도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가족들은 혼란 속에서 환자의 뜻과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제도의 취지와 달리 실제 현장에서는 자기결정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3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84.1%는 연명의료를원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지만, 실제 연명의료 중단이 이루어진 비율은 16.7%에 불과했다. 또 건강보험DB 자료에 따르면 연명의료를 받은 환자수와 전체 사망자 대비 비중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23년에는 사망자의67%가 연명의료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생애말기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가 마련되었음에도, 환자의 의향과 실제의료현장 사이에는 여전히 큰 괴리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과연 제도로 보장된 자기결정권만으로 좋은 죽음이 가능할까.
<좋은 죽음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죽음은 개인의 일이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결코 혼자 이루어질 수 없다. 어디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은지, 어떤 돌봄을 원하는지, 남겨질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에 대한 대화는 결국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전승욱 이사가 소개한 제주도 할아버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 당시 병원에서는 할아버지의 임종이 다가왔음에도 집으로 내보내 주지 않았고, 결국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어야 했다. 그 직후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평소 원하시던 집으로 돌아와 눕혔다. 장례 기간 동안 사람들은 부의금 대신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꽃을 가져왔고, 이웃 주민들은 화분을 놓고 가거나 본인의 재능을 살려 피아노를 치고 춤을 추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를 표했다. 덕분에 집은 꽃집처럼 화분으로 가득찼다. 장례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의식인 동시에, 함께 살아온 관계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일본의 ‘하카토모(墓友)’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신미화 「일본인의 인생 마지막 준비, 종활(終活)과 엔딩비즈니스」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저출산 고령화로 독신이 늘고 이혼도 증가해 무덤을 돌볼 후계자가 부족해지면서 무덤 문화가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이 과정에서 합장묘가 등장하게 되고, 이를 무덤친구 (하카토모)라고 부른다. 하카토모는 사후에 공동묘지나 추모목, 합장묘 등에 함께 묻히기로 약속한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렇게 하면 관리 비용이 들지않아 유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또 이들은 죽음을 계기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 납골 회사가 묘 친구들의 모임을 정기적으로 주선한다. 연 2~3회 모여 함께 식사하고 여행하며 관계를 만들고, 훗날 장례와 추모까지 함께 준비한다. 가족의 부재로 인한 장례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살아 있는 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고 관계를 맺으며 고립을 줄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죽음 이후의 문제를 대비하는 공동체이자, 현재의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부산의 무연고 사망자 사례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고인을 떠나보낸 것은 행정절차가 아니라 관계였다. 제도는 장례를 지원할 수 있지만, 누군가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일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통합돌봄은 왜 여전히 어려운가>
2026년부터 통합돌봄지원법이 시행되면서 정부는 의료·요양·돌봄 서비스를 지역사회 중심으로 통합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 법의 목표는 분명하다. 사람들이 시설이 아닌 집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통합돌봄이 기대만큼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문제는 서비스가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 기준 1인 가구 비율은 36.1%에 이르렀다. 가족 부양에 대한 인식은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으며, 고독사 역시 증가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관계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안부를 물어줄 사람도,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도 없다면 돌봄 서비스만으로는 고립을 해결할 수 없다. 통합돌봄의 과제는 의료와 복지 서비스를 연결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실제로 과거 통합돌봄지원법 시행을 앞두고 현장에서는 공동체의 역할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제기되어왔다.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 임종한 회장(2025, 한국사회연대경제 칼럼)은 우리 사회가 이웃을 돌볼시민사회의 돌봄 역량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황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돌봄통합지원법 국회토론회」(2025.4.11)에서 김영숙 토론자는 마을공동체가 오랫동안 주민들의 삶을 연결하는 ‘관계돌봄’을 실천해 왔음에도, 제도화 과정에서는 행정의 파트너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죽음을 다시 삶 안으로>
죽음을 둘러싼 논의는 흔히 병원과 시설, 제도의 문제로 설명된다. 그러나 취재 과정에서 만난 사례들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필요로 하는 것은 완벽한 제도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 마지막 선택을 존중해 줄 사람, 그리고 떠난 뒤에도 이야기를 나누어 줄 사람이었다. 병원 임종률이 높아진 이유도, 집에서 죽기 어려운 이유도, 통합돌봄이 쉽지 않은 이유도 결국은 관계망의 약화와 연결되어 있다.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만, 좋은 죽음은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 누구와 관계를 맺고, 어떤 공동체 안에서 살아왔는가와도 연결된다. 결국 죽음을 다시 삶 안으로 가져온다는 것은 죽음을 이야기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다. 서로를 돌보고 기억할 수 있는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좋은 죽음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현실적인 조건일지도 모른다.